장영실이 수레를 만들어야했던 세상 

 

 어릴 적 읽은 장영실의 전기를 떠올려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의 이미지는 묵묵하기 짝이 없는 학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뜻을 조용히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발명품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얌전한 과학자 말이다.

 

 그러나 <궁리>에 등장하는 장영실은 이전의 내 상상을 비껴가다 못해 뒤틀어버린다. 물론 이쪽의 상상이 훨씬 더 그럴싸하다. 천출의 낙인으로 평생을 우울하게 살다 이름도 없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벼슬자리에 앉힌 주군이라면, 주군에 대한 그의 충성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을지, 그것을 시샘한 기존 관리들의 눈총이 얼마나 따가운 것이었을지는 금방 상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들과 달리 천출이었던 장영실은 자신의 느낀 바든 욕망이든 간에 그 언행에 거침이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세종은 자신에게 그토록 충성스럽고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장영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것일까? <궁리>에서는 장영실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을 그 이유로 추측한다. 치세의 원리를 담고 있는 우주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리 믿음직한 장영실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등창으로 시달리는 세종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영실아를 수도 없이 외치는 장면에서, 세종이 장영실을 아꼈으나 한 나라의 군주인 탓에 인간적 정으로만 사람을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연출적 상상이 드러난다.

 

 한편 극 중 내내 안질과 등창으로 고생하는 세종의 모습은, ‘훌륭한 임금으로서의 세종보다는 나약했던 한 명의 인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리 역사에 유례없는 성군으로 남았지만, 각종 질고에 시달렸다는 기록에서 드러나듯, 개인으로서의 삶이 윤택하거나 성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던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이윤택의 역사극이 비추는 인물들은 임금이었던 연산, 선비였던 조남명, 무신이었던 이순신, 그리고 이제는 천민인 장영실까지 이어진다. 한 나라의 최고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인물에서, 가장 낮은 곳의 출신인 인물까지를 차례대로 다루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주인공을 담는 데에 주력한다. 임금도 선비도 무신도 천민도, 그 겉에 둘러싸인 모든 기표를 걷어내어 결국은 하나의 인간으로 남게 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궁리>에서는 세종도, 장영실도, 그 귀천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삶을 지탱해나가기 위한 투쟁을 벌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왕도 천민도 없는 이 시대에 여전히 우리가 장영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공과 업적을 세웠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개국 공신에게 밀려 태형 80대에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인간적 연민에 불과한 것일까?

 

 2012년의 한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법에 보장된 민주주의로 명시적인 평등을 보장받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여전히 암묵적인 신분이 존재하고, 그 신분에 따라 개인이 가진 기량을 펼치는 데에 제약이 따르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많은 장영실들을 생각하면, <궁리>를 보며 느끼는 씁쓸함과 연민이 그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감정에 그치는 것은 아니리라.

 

 수레를 만드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측우기와 자격루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라는 건 모든 시대가 증명해왔다. 최소한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의미 있는 삶을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장영실이 수레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연극 <궁리>와 함께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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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극을 보는 와중에도 우리는 극장에서 연극을 감상하는 중이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관점에서, 조금 더 냉철하게 극을 감상하고 사회가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막간극, 쉼 없는 방백, 삽화적 구성, 해설자의 등장, 조명 장치의 노출, 스타니슬라브스키식 연기술, 역사화를 통한 극작 등이 그러한 의도를 철저히 반영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관객이나 희곡의 독자들은, 감정이입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본능 속에 내재되어있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욕망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이 작품을 희곡으로 읽기 때문에 낯설게 하기 효과를 위한 장치들이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식 작법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런 장치들이 낯설게여겨지지 않는 현대에 살아가는데다, 전통극을 통해 개방적 의사소통구조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셴테이자 슈이타인 그녀를 무대 위의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로만 바라보기가 어렵다. 때로는 감정을 잔뜩 이입하고, 그녀의 수고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브레히트가 무덤에서 깨어난다면 통탄을 금치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감상문에서는,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가 독자나 관객에게 기대했던 해석 방식에 조금 충실해보려고 한다. 극 자체를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것보다는, 극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브레히트가 극을 집필했던 1930년대 말은, 아마도 슈이타가 없이 셴테가 살아남을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큰 전쟁을 겪은 뒤 혼란스럽던 틈을 타 히틀러가 득세하여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였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는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곳으로 묘사된 사천은 그러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셴테가 슈이타로 변장하는 시기가 있어야만 계속 셴테로 남을 수 있다는 역설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여우의 교활함을 떠올리게 한다. (마키아벨리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강력한 군주제를 원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의도는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하는 일이라 하여도, 현실세계에서는 그 방식마저 선하다면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셴테가 살아가는 사천이 그러했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12년의 세상이 그러하다. ‘선함이 조금만 얕보이면 약함으로 여겨져, 도처에서 눈을 번뜩이는 하이에나같은 이들에게 물어뜯기고 만다. 진정한 선을 실현하려면 그 겉모습까지 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천의 선인>을 읽으며 떠올렸던 우리 사회의 현상 중 하나는,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 체계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거나 범법자를 정당하게 처벌하기 위해 필요한 증인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셴테의 선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슈이타의 주도면밀함이 필요했던 것처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증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식의 보호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지를 행동으로 실현했을 때에 돌아올 보복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강요에서 시작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극중의 셴테는 자신의 몸을 팔아가면서도 남을 도왔고, 겨우 마련한 담배가게에서 제대로 된 수입이 생기기 전에도 이웃들을 돌보기에 바빴다. 무력한 신들이 선인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셴테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슈이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셴테의 행동이 어떤 동기로부터 출발했느냐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영리하게 슈이타가 됨으로써 자신의 선행을 완성시킨다. 설령 그녀의 선의지가 사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하여도,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나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사천은 셴테와 슈이타의 합작을 통해 분명 조금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셴테가 혼자 뿐이라면 그것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지만, 칭송받는 셴테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예를 따르기 원하고 실천한다면 그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셴테가 칭송받기 위해서는 슈이타의 수단이 이면에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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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연극 <마늘먹고 쑥먹고> 연구

: 허물어지는 경계를 중심으로

 

<목차>

1. 초현실성, 그리고 경계 허물기

2. 허물어지는 경계들

2.1. 장르의 경계

2.2. 공간의 경계

2.3. 긍정과 부정의 경계

2.4. ‘의 경계

3. 허물어진 것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

 

1. 초현실성, 그리고 경계 허물기

 오태석 연극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근대의 합리성과 대척점에 놓인 초현실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의 연극 전기 대표작 중 하나인 <>와 중기의 대표작 <백마강 달밤에>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이 모두 가시(可視)의 세계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현실과 꿈 사이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고, 생명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제시하고 있음이 대표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늘먹고 쑥먹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과 상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 특유의 성향이 반영된 작품인데, 심지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존 인식마저도 깨뜨려버리는 과감함을 보임으로써 초현실성이 극대화되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초현실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 출발점은 바로 경계 허물기에 있다. ‘합리효율이라는 이름하에 끊임없이 세상에 그어지는 구분선들과 그 위에 쌓아올려진 벽들, 그 벽을 허물어내는 순간 우리는 혼란을 느낌과 동시에 희열을 맛본다.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라고 하여, 우리가 현실과 완벽히 유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현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이 순간 초현실의 세계가 시작하는 것이다.


2. 허물어지는 경계들

 <마늘먹고 쑥먹고>에서 드러나는 양항적 경계의 허물어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데, 이 연구에서는 총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허물어지는 경계는 장르의 경계, 공간의 경계, 긍정과 부정의 경계, 그리고 의 경계로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오태석의 기존 작품들과 맺는 상호 텍스트성, 그리고 오랜 시간 그의 작품세계에 그려진 수많은 경계 허물기를 고려하여 해당 텍스트 외의 기존 작품에 대한 관찰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2.1. 장르의 경계

 <마늘먹고 쑥먹고>의 경계 허물기는, 현대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는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 종합 예술체가 그러했듯, 이 극에는 연극과 노래와 춤, 그리고 제의까지 자유롭게 어우러진다.

 <마늘먹고 쑥먹고>는 전체적으로 우리 산대 놀이의 형식을 빌려온 극이다. 물론 산대 놀이 자체가 종합적인 성격을 띠는 극이지만 이 작품은 현대에 창작된 작품이며, 전통을 완벽하게 고수하는 방식이기보다는 극의 전반에 현대적 요소들을 결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광판의 활용이다. 이는 보편적인 연극에서 찾기 힘든 연출 방식인데, 이 전광판은 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영상 매체에서의 자막이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 또한 기존의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로써 경계를 허문 하나의 시도로 바라볼 수 있다.


2.2. 공간의 경계

 오태석의 <자전거>에서는 현재와 과거, 실재와 허구의 공간이 빈번하게 교차하며, <춘풍의 처><백마강 달밤에>에서는 이승 세계와 저승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또한 <내사랑 DMZ>에서는 극적 현실과 그 외부의 세계가 교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마당과 마당을 거쳐가며 드러나는 <마늘먹고 쑥먹고>의 물리적 공간 배경은 역동적이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출발하여 DMZ를 거쳐 백두산까지, 국경을 두 번이나 넘는 셈이다. 사실상 섬과 다름없이 고립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간적 이동이지만, 작가의 상상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극 중의 현실이 공식적으로 통일된 한반도인지, 여전히 분단 현실에 놓여있는 한반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신장수가 DMZ를 넘어가면 총에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대사에서, 극중 현실에서 남한과 북한이 극 바깥 현실의 남북처럼 대치의 상황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신장수와 순단은 경계를 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신장수 이러구 DMZ 넘어가- 나 쏴죽여라 그러구 고함 치면서 갈까.

순단 애국심 발동헙시다. 백두산 정계비를 찾았다 그거 제 자리 세우러 간다.

(중략)

순단 그렁게 나무로 각 짜서 여가 정계비가 들었다 그러구 같이 가요.

신장수 자네도 가.

순단 동업잔게.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면 신()들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 또한 그 경계가 허물어짐을 찾아볼 수 있다. 극중 당집 마당에는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할멈의 도토리묵을 먹으며 할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의 세계에 신들이 어울려 산다는 우리의 전통적 사고와도 맞닿아 있다.

 각각 삶과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이승과 저승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나 저승이라는 공간에 속한 역사적 인물들인 김구, 조만식, 최남선을 등장하는 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이들을 극 중 현실에 등장시킨 것은, 남북의 화합이라는 전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효과적인 기호를 내세운 셈이다.

 그리고 전설 속의 인물 허도령을 육로로 구만 사천 리, 수로로는 팔만 사천 리거리의 저승에서 환상적 장치를 통해 불러내고, 우리가 잃어버린 하회탈 세 개를 되찾아 현재의 상실을 메우고 합일로 나아가는 기능을 수행케 한다.


2.3. 긍정과 부정의 경계

 <마늘먹고 쑥먹고>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들은, 오태석의 기존 작품과 상호 텍스트성을 드러낸다. 순단과 할멈은 <백마강 달밤에>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며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는것이라든가, <내사랑 DMZ>에서 다루었듯이 DMZ라는 공간을 남북의 합일을 위한 중요 공간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 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상호텍스트성이 단순한 반복이나 변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작품에 존재했던 긍정과 부정의 경계마저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가령, 오태석의 <비닐하우스>에서 비닐하우스라는 공간은 푸코의 판옵티콘(panopticon)을 연상하게 하는 중앙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다. 그런데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는 그 비닐하우스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려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호원 등의 통제에 의해 재소자들은 획일화되고 지능은 낮아지게 되지만, ‘곰이 되기 위한 훈련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이는 인간이 곰으로 변화하는 것이 북한 식량난을 해결할 실질적 방법이며, ‘이 우리 민족의 근원이자 자연물의 상징이기에 인간이 곰이 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들의 선악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생기는 경계의 허물어짐을 찾을 수 있다. 등장 초반에 남을 속여 고무신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물로 묘사된 신장수는, 호랑이 탈을 받아쓰고 순단과 함께 백두산에 가는 중대하고도 훌륭한 임무를 수행한다. 장삼이사의 평범한 인물도 아닌,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에 가까운 사기꾼에게 호랑이 탈을 씌움으로써 독자와 관객들은 우리 중 누구라도 그 호랑이가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친일 행적이 드러나 부정적으로 알려진 인물인 최남선이 백두산 정계비를 발견해내고 다시 세우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육당 최남선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사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보다는,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시각을 취하는 오태석의 기존 역사극 경향과 일치한다. <천년의 수인><잃어버린 강>에서는 극좌세력과 극우세력을(비전향장기수와 안두희), 일본 제국주의와 항일세력(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도 화해시키는 그의 작품들을 본다면, 이 작품에서 최남선에 대한 묘사는 오히려 그 정도가 덜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작가의 이러한 역사관이 객관적 진리를 외면한 역사 왜곡적 화해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의 역사관이 단순히 과거사에 머무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2.4. ‘의 경계

 ‘곰이 변신해 사람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 후손들이다.’라는 단군 신화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현대의 국사학자들은, 이 신화가 우리의 선조가 곰을 숭배하거나 곰으로 상징되는 부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는 우리의 근원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자연과 스스로를 크게 분리시키지 않았던 성향까지도 알 수 있게 한다. 곰이라는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까지가 단군신화의 몫이었다면, <마늘먹고 쑥먹고>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이 훈련을 통해 다시 곰이나 맹도견 등의 동물로 변한다는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자연과 인간을 양쪽 극에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견해는, 인간의 발전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서구의 근대 경제 발전 논리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진정한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제 3세계의 빈곤 등을 증거로 그 허점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형태, 즉 자연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발전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러한 담론에는 생태적 관점이 기저에 깔려있는데, 인간인 가 자연인 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지우고 자연 속에 조화롭게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극은 국내 최초 전막 가면극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누구든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의 모습을 구분 짓지 않을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가면극의 특징상 가면만 바꾸어 쓰면 가 될 수 있고 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그리고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경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3. 허물어진 것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

 경계가 허물어진 극 중의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대본을 덮는 순간, 극장을 나서는 순간, 또 다시 수많은 벽들을 마주하며 느끼는 좌절은 그 잠깐의 자유로움과 비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오태석의 작품 경향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한다. 논리보다는 비약으로,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딱딱하게 조여져 있는 현실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다. 천진함마저 느껴지는 노()작가의 시도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듯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 보이는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도 여전히 허물지 못한 경계가 하나 있는데, 바로 민족이라는 경계이다. 자유로이 경계를 넘어 백두산에까지 진출한 우리가, 그 땅의 사람들을 타자로 인식하고 우리의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극의 출발점이 우리 민족의 시작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유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경계 허물기의 궁극적 목적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민족이라는 집합체에 있어서도 우리그들의 경계를 잊어버리게 되는 단계에 이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김향(2009), <오태석의 창작 원리 틈의 미학연구>, [한국극예술연구] Vol.29, 한국극예술학회.

명인서·최준호 편저(1995), 오태석의 연극 세계, 현대미학사.

신현숙(1995), <백마강 달밤에에 나타난 초현실주의적 특성>, [인문과학연구] Vol.1,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이상란(2011), 오태석 연극 연구, 서강대학교출판부.

조보라미(2009), 오태석 역사극 연구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자료집] Vol.2009 No.3, 한국현대문학회.

최승연(2003), 오태석 희곡/연극의 환상성 연구: 2003년도 판 <내 사랑 DMZ>를 중심으로, [돈암어문학] 16, 돈암어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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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계(hierarchy)의 기호학적 개념을 구성하고, 그 활용 사례를 제시하시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그 표면의 특질만을 보고 스쳐가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이면 혹은 기저에 숨겨진 특질을 이끌어낸다. 또한 그 발견에 근사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세상에서 벌어졌던,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벌어질 일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외피 너머의 것을 끌어내어 설명하는 일이 인문학자의 작업이라면, 그는 현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설명하는 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한다.

 

지금과 같이 인문학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짐작컨대 그 작업의 과정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역사와 문학 그리고 철학이 구별되지 않았던 것은 동서를 불문하고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학문들이 고유의 영역을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영역과의 차이를 둠으로써 각자의 입지를 공고히 한 결과 각자의 고유한 이름이 붙어 분류되는 지금의 학문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인문학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엄격한 의미의 학문적 경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한다면 그 영역 내에서 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 학문 간 소통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기호학에 대해 흔히 권력이 없는 학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호학을 언급하고 연구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위에서 언급했듯 학문간 소통이 증가하는 추세에서 비롯한다. 각각의 학문 체계가 가진 다른 방식의 언어를 매개하여 세상의 현상을 기호를 중심으로 한 구조로 설명함으로써, 학문 간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메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영역에 고립되어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기보다는, 메타언어를 통해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시도되는 총체적인 연구가 유의미함은 많은 학자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특히나 분야나 장르의 경계를 초월하는 간단명료한 기호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모든 현상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구조주의 기호학자들의 주된 작업이다.

 

기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우는 소쉬르와 퍼스를 필두로 수많은 기호학 연구가 있어왔고, 문화라는 거대한 현상을 기호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야콥슨, 로트만, 그레마스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왔다.

 

특히 유리 로트만은 베르나츠키의 생물계(biosphere)’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기호계(semiosphere)’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기호계는 언어들의 존재와 기능을 위해 필요한 기호학적 공간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 곳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이원주의와 비대칭성이라는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로트만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기호계의 내적 공간은 불균등하지만 동시에 통일되고, 비대칭적이지만 균질적이다. 모든 문화는 세계를 자체의 우리혹은 의 내적 공간과, ‘혹은 그들의 외적 공간으로 나눔으로써 시작된다. 죽은 것으로부터 살아있는 것을, 유목으로부터 정착을, 평야로부터 도시를 분리시키기도 한다.

 

기호학적 체계의 구조적 조직화에서 최고 형식과 최종 행위는 그것이 그것 자체를 기술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문법들이 기술되고 관습과 법칙들이 코드화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날 때 체계는 유연성과 향상된 정보능력, 역동적 발전을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미결정성의 창고를 상실해버린다. 물론 자기 기술의 단계는 너무 많은 다양성의 위협에 대응하여 필요한 것이지만, 유연성을 잃고 경직될 수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모든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의미가 발생한다. 가령 적도 부근의 열대 지방에만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은, 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달리 더위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 것이다. 항상 같은 기후 조건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환경을 덥다는 유표적 기호나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호 간에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그 차이들은 사회 내에서 동등하게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표현의 편의상 어떠한 성질을 가지는 것을 +, 갖지 않는 것을 로 표현한다면, 그 속성을 갖고 있음과 갖지 않음은 단순한 차이로 대칭적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사회에서든지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담론, 주류(main stream)’에서 존재하는 선호에 따라 기호 간의 차이는 형식적으로는 대칭이지만 실질적인 비대칭성을 낳는다. 그 선호는 의도적인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자연스러운 위계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가령 위에서 언급했던 더위라는 기호는 따뜻함이라는 기호와 비교했을 때 ‘+불쾌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므로, 똑같이 고온이라는 속성을 보유함에도 불구하고 ‘-불쾌의 속성을 지닌 따뜻함보다는 배척되는 경향이 있다.

 

무표적인 기호들, 즉 사회적 담론에서 주류(main stream)의 코드에서 어긋나지 않으므로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기호들이 있다면 주류의 코드에 비해 유표적인 기호들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 의도와 상관없이 유표성을 가지는 기호들은 소외나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사회를 주도해가는 기호들이 권력을 얻게 되면 그들의 코드에서 비껴가는 다른 약호들은, 흔히 말하는 모난 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 구조는 항구 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성을 기저에 두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의 과정에서는 수많은 중간적 단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끊임없는 약호들 간의 충돌로 다양한 변이를 산출해내기도 한다.

 

서양에서 고대 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의 세계를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론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가 인간을 죄로 이끄는 쾌락과 결합되어 있다고 하여 윤리적으로 열등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스테시스는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약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양에서 육체라는 기호 주변의 감각’, ‘욕망등의 기호는 정신을 둘러싼 이성’, ‘지각등의 기호가 중심부에 놓여 권력을 가졌던 오랜 기간 동안 상대적 소외의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위계 구조는 상당히 공고한 것이어서 플라톤이 살았던 기원전 400년대의 세계부터 장장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큰 틀에서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 긴 세월동안 다른 영역의 담론들은 천지개벽의 정도로 위계질서의 전복이 이루어졌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호계의 역동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유별난 위계에 도전장을 내민 건 바로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현상학이었다. 종래의 서구 철학과 문화 전반에서는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로, 몸을 시공을 채우고 있는 도구’(‘+수단’, ‘-목적’, ‘-주체’) 정도로 보았다. , 몸이 있기에 모든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잊었던 셈이다. 메를로퐁티에 따르자면 이는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규정된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몸은 외부에 존재하는 의식의 지각 대상이기 이전에,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된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허구적인 원근법에 드러나는 약호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들은, 그때까지의 회화의 탐구와 역사를 마감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회화의 기초를 확립한 척 한에 있어서 거짓된 것들이었다. 반면 화가들은 어떤 원근법의 기술도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 회화에서 원근법의 약호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구성된 시야를 보여주는 허구적인 약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안의 존재인 몸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 세계 바깥에 위치하는 의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에 대해 작위적으로 설정된 허구적인 지점이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두고도 존재의 조직 안에 들어있는 눈의 관점에 따라 그때그때 나타나는 시야만이 있으며, 그림 역시 무한하게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식’ ‘지각등의 약호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감각이라는 약호들이 중심에 서서 무표적인 기질을 획득하는 위계의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위계가 도전을 받았고 그 흐름에 영향을 받아 라깡, 들뢰즈 등의 학자들은 이라는 배제되어있던 기호와 그를 둘러싼 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주류의 코드와는 영영 일치되지 않을 것 같았던 감각이나 욕망이라는 약호들이 2012년 오늘날에는 눈에 띄거나 주목받지도 않고, 오히려 정신적이라든가 지각’, ‘이성등의 약호가 유표적이 되어버린 것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몸의 아름다움에 관한 기호들, 신체적 건강에 관한 기호들이 대중매체 등을 통해 끊임없이 노출되고 재생산되는 현상을 보면 언제 이 기호들이 유표적이었던 때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물론 기호계의 역동적 구조를 고려한다면 지금의 위계 또한 시간이 지나고 기호들의 상호작용과 충돌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 과정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몸에 몰입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시선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표적인 중심부를 둘러싸고 안정적이고 조용한 기호계를 상상한다면 외관상 평화로워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역동성이 결여된 기호계는 존재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특수한 상황 하에 그런 기호계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주변부에서 특별한 모양 없이 부유하는 수많은 기호들의 잠재적 에너지가 분출될 기회를 박탈시키는 셈이다. 주류의 무표성과 소통하고 끊임없이 침투하려는 주변부의 유표적 기호들이 있는 한, 그 기호계는 건강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Danzon

나도 목란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서럽고 많이 아팠던 이번 봄의 내게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나지막이 다독여주던 목란언니에게, 기회가 된다면 정작 당신은 괜찮은 것인지묻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이 그리도 고맙게 느껴졌던 나를 되돌아보니, 그녀 또한 괜찮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를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일순간 마음이 먹먹해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터민이라고도 일컬어지지만 흔히 탈북자라는 주홍 글씨와도 같은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2만명 가량 함께 사는 시대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괜찮다는 말이 결코 예삿말이 아닐 것이다. 국경을 넘으며 마주했을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토록 원하던 땅을 밟았지만 타자(他者)로 취급받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깊은 한으로 울어낼 괜찮다일지 모른다.

 

무대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사방의 관객에게서 쏘아지는 시선의 거미줄에 얽혀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대 위에서, 몸 하나 겨우 눕히면 꽉 들어차는 작은 크기의 침상 위에서 다리는 쭉 페고자라는 대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에 아찔함을 느낀 건 나뿐이었을까?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고, 그 시선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조대자 여사의 말처럼 쉴 새 없이 달리기에도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과연 두 다리 쭉 페고 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으니 말이다.

 뒷모습조차 편치 못한 중앙무대의 공간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몽타주들은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이 동떨어진 세상처럼 느껴지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움찔하게 만든 이유는 이 무대의 역할이 컸다. 현실이라는 쌀알을 뻥튀기 해놓은 듯한 연출에서도, 배우들이 등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현실감을 주기에 상당히 효과적인 장치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같은 연출과 연기가 이루어졌더라면, 어린 목란이 영어를 남발하던 유치원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장면이나 조대자와 강국식의 다국어 대화 장면 등은 객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만나야겠지요.

 중앙 무대에 연결된 두 개의 보조 무대는 대부분 남한과 북한을 각각 상징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수령 동지의 초상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한 쪽은 붉은 조명을 주로 사용하여 북한을 형상화하였고, 단군 왕검, 태조 이성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걸린 한 쪽은 파란 조명을 주로 사용하여 남한을 형상화하였다. 남한을 상징하는 보조무대에는 그 초상들과 같이 목란의 과거 사진들이 걸려있었는데, 아마도 목란이 그런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이 동등한민주주의의 일원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그녀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현재 목란이 거주하는 남한이라는 공간에서 부유하는 것을 표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하게 만들었다.

 또한 두 보조무대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중앙무대를 통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 거리가 많이 멀기는 하지만 둘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할 운명임을, 그리고 그 과정에는 남한과 북한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중앙무대의 공간이 필요함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남북한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서로를 적대시하기에 바쁜 최근의 정세는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던 통일과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당위성은 제쳐두고)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그 통로가 될 중앙무대에 커다란 벽이 하나 가로막혀있는 셈이지 않은가 말이다.

 

책이 아닌 구원은 어디에?

 문학, 사학, 철학이 설 곳을 잃은 시대를 보여주는 삼남매의 좌절은 인문학도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대의 소품 중 제법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들은 그들이 한때 가슴 가득 품었던 학문적 열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퀴퀴하게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은 점점 존재의미를 상실해 가고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심지어는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장면까지도 나온다. 인문학도에게는 그 존재의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은 그들의 구원이, 아니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상 삼남매의 구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어느 순간 가족의 일원으로 불쑥 끼어든 목란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란의 순수성이 태산, 태강, 그리고 태양을 구원하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순수한 그녀는, 조대자 여사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이 바로 선인간형이며 그 특유의 올곧음으로 삼남매를 구원할 빛줄기처럼 다가간다. 물론 결말부를 통해 드러나듯 목란의 작은 힘으로는 그들을 궁극적 구원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으며 목란 본인조차도 결국은 거대한 구조의 힘 앞에서 그 순수를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잠시나마 이 먹물들을 향한 인간적 애정이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먹물의 우상과도 같은 책의 활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으며, 태산의 아픔을 치유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대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가족의 대들보이자 삼남매의 근원이며 자본주의 이면의 아픔을 상징하는 대자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목란의 순수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코디언, 그리고 5천만 원.

 극을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소재가 있다면 바로 아코디언과 돈 ‘5천만 원일 것이다. 목란의 순수를 상징하는 아코디언은 태산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었고, 아코디언과 그 선율은 목란이 떠나간 이후에도 태산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반면 목란은 그리도 원하던 5천만 원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은 그리던 고향으로 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순수를 완벽히 상실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목란이 아코디언과 5천만 원 중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폐쇄적인 북한의 사회구조가 그녀를 도망치게 만들었으며, 힘겹게 들어온 남한에서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물론 냉정히 말한다면 남한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이 땅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각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에 적응함으로써 5천만 원을 획득한 결과는 더욱 더 참혹하다. 태강이 그녀에게 5천만 원을 주지 않았더라면, 목란이 그냥 이 땅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더라면, 최소한 그녀는 아코디언을 품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미안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지 못해서.

 목란언니가 내게 괜찮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지 자문한다면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의 중앙무대에는 거대한 장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다, 경쟁에서 지지 않고 달리느라 내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여유나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미래를 구원하려는 순수의 손길이 아코디언 선율로 뻗어온다면, 코웃음치며 차라리 활자에 얼굴을 파묻어버리거나 로또에 매주 5천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을는지.

 

 그래서 미안합니다. 지금의 나는 목란언니 당신에게 괜찮다고 토닥여주지 못합니다. 이 땅 어딘가에서 숨 쉬고 같이 살아가고 있을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조차 서툴기에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2시간 가까이 아코디언 소리를 들어가며, 휘몰아치듯 지나가던 당신의 일부 속에서 호흡하며, 그리고 이렇게 글로 풀어내며 발견한 가느다란 빛줄기나마 구원으로 여기며 붙잡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 당신을 위로할 날이 올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그릇이 조금 더 깊어지고 커질 수 있다면, 이 달리기를 조금 멈추고 아코디언을 품어볼 용기를 내어보려 합니다.

Posted by Danzon
2012. 4. 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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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gowski 논문 -

political_cleavages_and_changing_exposure_to_trade.pdf

 

링크:

 -금본위제 개괄 : http://en.wikipedia.org/wiki/Gold_standard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정치경제학적 해석 : http://en.wikipedia.org/wiki/Political_interpretations_of_The_Wonderful_Wizard_of_Oz

Posted by Danzon

상당히 좋은 책이다.


Global Capitalism

저자
Frieden, Jeffry A. 지음
출판사
Meinsenbach | 2007-04-0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In 1900 international trade reached...
가격비교

 문장이 매우 깔끔하며, 인과관계가 상당히 명확하다. 단지 영어 책은 한국어 책보다 느리게 읽히기 때문에 부담일 뿐인데, 시간이 조금 더 넉넉하게 주어졌더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근잘근(!) 씹어서 읽고 싶다. 문장이 워낙 좋다보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한 자유무역이 절정을 달리던 20세기 초,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 번의 대공황을 겪으며 영국->미국으로의 자본 중심이 이동했던 것, 그리고 20세기 말까지의 자본주의 흐름을 다룬 책이다. 정치와 경제를 떼놓을 수 없는 탓에, 정치적 상황이나 역사적 흐름이 간간히 언급되는데 중요한 것만 등장하다보니 배경지식 없으면 나처럼 '잉?' 할 수도 있지만 중학교 때 배웠던 정도의 세계사 지식이라면 대충은 넘어갈 수 있는 정도.

 시험 준비하면서 여기다가 간간히 summary 정도를 올리..지...않으려나....

Posted by Danzon
Posted by Danz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