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 연극 <마늘먹고 쑥먹고> 연구

: 허물어지는 경계를 중심으로

 

<목차>

1. 초현실성, 그리고 경계 허물기

2. 허물어지는 경계들

2.1. 장르의 경계

2.2. 공간의 경계

2.3. 긍정과 부정의 경계

2.4. ‘의 경계

3. 허물어진 것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

 

1. 초현실성, 그리고 경계 허물기

 오태석 연극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근대의 합리성과 대척점에 놓인 초현실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의 연극 전기 대표작 중 하나인 <>와 중기의 대표작 <백마강 달밤에>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이 모두 가시(可視)의 세계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현실과 꿈 사이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고, 생명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제시하고 있음이 대표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늘먹고 쑥먹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과 상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 특유의 성향이 반영된 작품인데, 심지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존 인식마저도 깨뜨려버리는 과감함을 보임으로써 초현실성이 극대화되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초현실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 출발점은 바로 경계 허물기에 있다. ‘합리효율이라는 이름하에 끊임없이 세상에 그어지는 구분선들과 그 위에 쌓아올려진 벽들, 그 벽을 허물어내는 순간 우리는 혼란을 느낌과 동시에 희열을 맛본다.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라고 하여, 우리가 현실과 완벽히 유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현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이 순간 초현실의 세계가 시작하는 것이다.


2. 허물어지는 경계들

 <마늘먹고 쑥먹고>에서 드러나는 양항적 경계의 허물어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데, 이 연구에서는 총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허물어지는 경계는 장르의 경계, 공간의 경계, 긍정과 부정의 경계, 그리고 의 경계로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오태석의 기존 작품들과 맺는 상호 텍스트성, 그리고 오랜 시간 그의 작품세계에 그려진 수많은 경계 허물기를 고려하여 해당 텍스트 외의 기존 작품에 대한 관찰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2.1. 장르의 경계

 <마늘먹고 쑥먹고>의 경계 허물기는, 현대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는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 종합 예술체가 그러했듯, 이 극에는 연극과 노래와 춤, 그리고 제의까지 자유롭게 어우러진다.

 <마늘먹고 쑥먹고>는 전체적으로 우리 산대 놀이의 형식을 빌려온 극이다. 물론 산대 놀이 자체가 종합적인 성격을 띠는 극이지만 이 작품은 현대에 창작된 작품이며, 전통을 완벽하게 고수하는 방식이기보다는 극의 전반에 현대적 요소들을 결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광판의 활용이다. 이는 보편적인 연극에서 찾기 힘든 연출 방식인데, 이 전광판은 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영상 매체에서의 자막이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 또한 기존의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로써 경계를 허문 하나의 시도로 바라볼 수 있다.


2.2. 공간의 경계

 오태석의 <자전거>에서는 현재와 과거, 실재와 허구의 공간이 빈번하게 교차하며, <춘풍의 처><백마강 달밤에>에서는 이승 세계와 저승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또한 <내사랑 DMZ>에서는 극적 현실과 그 외부의 세계가 교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마당과 마당을 거쳐가며 드러나는 <마늘먹고 쑥먹고>의 물리적 공간 배경은 역동적이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출발하여 DMZ를 거쳐 백두산까지, 국경을 두 번이나 넘는 셈이다. 사실상 섬과 다름없이 고립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간적 이동이지만, 작가의 상상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극 중의 현실이 공식적으로 통일된 한반도인지, 여전히 분단 현실에 놓여있는 한반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신장수가 DMZ를 넘어가면 총에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대사에서, 극중 현실에서 남한과 북한이 극 바깥 현실의 남북처럼 대치의 상황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신장수와 순단은 경계를 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신장수 이러구 DMZ 넘어가- 나 쏴죽여라 그러구 고함 치면서 갈까.

순단 애국심 발동헙시다. 백두산 정계비를 찾았다 그거 제 자리 세우러 간다.

(중략)

순단 그렁게 나무로 각 짜서 여가 정계비가 들었다 그러구 같이 가요.

신장수 자네도 가.

순단 동업잔게.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면 신()들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 또한 그 경계가 허물어짐을 찾아볼 수 있다. 극중 당집 마당에는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할멈의 도토리묵을 먹으며 할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의 세계에 신들이 어울려 산다는 우리의 전통적 사고와도 맞닿아 있다.

 각각 삶과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이승과 저승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나 저승이라는 공간에 속한 역사적 인물들인 김구, 조만식, 최남선을 등장하는 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이들을 극 중 현실에 등장시킨 것은, 남북의 화합이라는 전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효과적인 기호를 내세운 셈이다.

 그리고 전설 속의 인물 허도령을 육로로 구만 사천 리, 수로로는 팔만 사천 리거리의 저승에서 환상적 장치를 통해 불러내고, 우리가 잃어버린 하회탈 세 개를 되찾아 현재의 상실을 메우고 합일로 나아가는 기능을 수행케 한다.


2.3. 긍정과 부정의 경계

 <마늘먹고 쑥먹고>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들은, 오태석의 기존 작품과 상호 텍스트성을 드러낸다. 순단과 할멈은 <백마강 달밤에>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며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는것이라든가, <내사랑 DMZ>에서 다루었듯이 DMZ라는 공간을 남북의 합일을 위한 중요 공간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 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상호텍스트성이 단순한 반복이나 변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작품에 존재했던 긍정과 부정의 경계마저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가령, 오태석의 <비닐하우스>에서 비닐하우스라는 공간은 푸코의 판옵티콘(panopticon)을 연상하게 하는 중앙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다. 그런데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는 그 비닐하우스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려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호원 등의 통제에 의해 재소자들은 획일화되고 지능은 낮아지게 되지만, ‘곰이 되기 위한 훈련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이는 인간이 곰으로 변화하는 것이 북한 식량난을 해결할 실질적 방법이며, ‘이 우리 민족의 근원이자 자연물의 상징이기에 인간이 곰이 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들의 선악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생기는 경계의 허물어짐을 찾을 수 있다. 등장 초반에 남을 속여 고무신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물로 묘사된 신장수는, 호랑이 탈을 받아쓰고 순단과 함께 백두산에 가는 중대하고도 훌륭한 임무를 수행한다. 장삼이사의 평범한 인물도 아닌,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에 가까운 사기꾼에게 호랑이 탈을 씌움으로써 독자와 관객들은 우리 중 누구라도 그 호랑이가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친일 행적이 드러나 부정적으로 알려진 인물인 최남선이 백두산 정계비를 발견해내고 다시 세우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육당 최남선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사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보다는,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시각을 취하는 오태석의 기존 역사극 경향과 일치한다. <천년의 수인><잃어버린 강>에서는 극좌세력과 극우세력을(비전향장기수와 안두희), 일본 제국주의와 항일세력(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도 화해시키는 그의 작품들을 본다면, 이 작품에서 최남선에 대한 묘사는 오히려 그 정도가 덜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작가의 이러한 역사관이 객관적 진리를 외면한 역사 왜곡적 화해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의 역사관이 단순히 과거사에 머무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2.4. ‘의 경계

 ‘곰이 변신해 사람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 후손들이다.’라는 단군 신화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현대의 국사학자들은, 이 신화가 우리의 선조가 곰을 숭배하거나 곰으로 상징되는 부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는 우리의 근원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자연과 스스로를 크게 분리시키지 않았던 성향까지도 알 수 있게 한다. 곰이라는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까지가 단군신화의 몫이었다면, <마늘먹고 쑥먹고>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이 훈련을 통해 다시 곰이나 맹도견 등의 동물로 변한다는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자연과 인간을 양쪽 극에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견해는, 인간의 발전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서구의 근대 경제 발전 논리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진정한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제 3세계의 빈곤 등을 증거로 그 허점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형태, 즉 자연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발전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러한 담론에는 생태적 관점이 기저에 깔려있는데, 인간인 가 자연인 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지우고 자연 속에 조화롭게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극은 국내 최초 전막 가면극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누구든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의 모습을 구분 짓지 않을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가면극의 특징상 가면만 바꾸어 쓰면 가 될 수 있고 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그리고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경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3. 허물어진 것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

 경계가 허물어진 극 중의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대본을 덮는 순간, 극장을 나서는 순간, 또 다시 수많은 벽들을 마주하며 느끼는 좌절은 그 잠깐의 자유로움과 비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오태석의 작품 경향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한다. 논리보다는 비약으로,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딱딱하게 조여져 있는 현실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다. 천진함마저 느껴지는 노()작가의 시도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듯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 보이는 <마늘먹고 쑥먹고>에서도 여전히 허물지 못한 경계가 하나 있는데, 바로 민족이라는 경계이다. 자유로이 경계를 넘어 백두산에까지 진출한 우리가, 그 땅의 사람들을 타자로 인식하고 우리의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극의 출발점이 우리 민족의 시작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유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경계 허물기의 궁극적 목적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민족이라는 집합체에 있어서도 우리그들의 경계를 잊어버리게 되는 단계에 이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김향(2009), <오태석의 창작 원리 틈의 미학연구>, [한국극예술연구] Vol.29, 한국극예술학회.

명인서·최준호 편저(1995), 오태석의 연극 세계, 현대미학사.

신현숙(1995), <백마강 달밤에에 나타난 초현실주의적 특성>, [인문과학연구] Vol.1,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이상란(2011), 오태석 연극 연구, 서강대학교출판부.

조보라미(2009), 오태석 역사극 연구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자료집] Vol.2009 No.3, 한국현대문학회.

최승연(2003), 오태석 희곡/연극의 환상성 연구: 2003년도 판 <내 사랑 DMZ>를 중심으로, [돈암어문학] 16, 돈암어문학회.

Posted by Danz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