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관객이나 희곡의 독자들은, 감정이입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본능 속에 내재되어있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욕망’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이 작품을 희곡으로 읽기 때문에 낯설게 하기 효과를 위한 장치들이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식 작법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런 장치들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현대에 살아가는데다, 전통극을 통해 개방적 의사소통구조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셴테이자 슈이타인 그녀를 ‘무대 위의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로만 바라보기가 어렵다. 때로는 감정을 잔뜩 이입하고, 그녀의 수고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브레히트가 무덤에서 깨어난다면 통탄을 금치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감상문에서는,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가 독자나 관객에게 기대했던 해석 방식에 조금 충실해보려고 한다. 극 자체를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것보다는, 극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브레히트가 극을 집필했던 1930년대 말은, 아마도 ‘슈이타가 없이 셴테가 살아남을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큰 전쟁을 겪은 뒤 혼란스럽던 틈을 타 히틀러가 득세하여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였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는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곳으로 묘사된 사천은 그러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셴테가 슈이타로 변장하는 시기가 있어야만 계속 셴테로 남을 수 있다는 역설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여우의 교활함’을 떠올리게 한다. (마키아벨리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강력한 군주제를 원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의도는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하는 일이라 하여도, 현실세계에서는 그 방식마저 선하다면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셴테가 살아가는 사천이 그러했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12년의 세상이 그러하다. ‘선함’이 조금만 얕보이면 ‘약함’으로 여겨져, 도처에서 눈을 번뜩이는 하이에나같은 이들에게 물어뜯기고 만다. 진정한 선을 실현하려면 그 겉모습까지 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천의 선인>을 읽으며 떠올렸던 우리 사회의 현상 중 하나는,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 체계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거나 범법자를 정당하게 처벌하기 위해 필요한 증인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셴테의 선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슈이타의 주도면밀함이 필요했던 것처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증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식의 보호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지를 행동으로 실현했을 때에 돌아올 보복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강요에서 시작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극중의 셴테는 자신의 몸을 팔아가면서도 남을 도왔고, 겨우 마련한 담배가게에서 제대로 된 수입이 생기기 전에도 이웃들을 돌보기에 바빴다. 무력한 신들이 선인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셴테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슈이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셴테의 행동이 어떤 동기로부터 출발했느냐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영리하게 슈이타가 됨으로써 자신의 선행을 완성시킨다. 설령 그녀의 선의지가 사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하여도,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나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사천은 셴테와 슈이타의 합작을 통해 분명 조금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셴테가 혼자 뿐이라면 그것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지만, 칭송받는 셴테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예를 따르기 원하고 실천한다면 그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셴테가 칭송받기 위해서는 슈이타의 수단이 이면에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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