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 나부랭이/국문과

연극 <궁리> 리뷰 : 장영실이 수레를 만들어야했던 세상

Danzon 2012. 5. 30. 01:42

장영실이 수레를 만들어야했던 세상 

 

 어릴 적 읽은 장영실의 전기를 떠올려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의 이미지는 묵묵하기 짝이 없는 학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뜻을 조용히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발명품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얌전한 과학자 말이다.

 

 그러나 <궁리>에 등장하는 장영실은 이전의 내 상상을 비껴가다 못해 뒤틀어버린다. 물론 이쪽의 상상이 훨씬 더 그럴싸하다. 천출의 낙인으로 평생을 우울하게 살다 이름도 없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벼슬자리에 앉힌 주군이라면, 주군에 대한 그의 충성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을지, 그것을 시샘한 기존 관리들의 눈총이 얼마나 따가운 것이었을지는 금방 상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들과 달리 천출이었던 장영실은 자신의 느낀 바든 욕망이든 간에 그 언행에 거침이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세종은 자신에게 그토록 충성스럽고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장영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것일까? <궁리>에서는 장영실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을 그 이유로 추측한다. 치세의 원리를 담고 있는 우주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리 믿음직한 장영실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등창으로 시달리는 세종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영실아를 수도 없이 외치는 장면에서, 세종이 장영실을 아꼈으나 한 나라의 군주인 탓에 인간적 정으로만 사람을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연출적 상상이 드러난다.

 

 한편 극 중 내내 안질과 등창으로 고생하는 세종의 모습은, ‘훌륭한 임금으로서의 세종보다는 나약했던 한 명의 인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리 역사에 유례없는 성군으로 남았지만, 각종 질고에 시달렸다는 기록에서 드러나듯, 개인으로서의 삶이 윤택하거나 성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던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이윤택의 역사극이 비추는 인물들은 임금이었던 연산, 선비였던 조남명, 무신이었던 이순신, 그리고 이제는 천민인 장영실까지 이어진다. 한 나라의 최고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인물에서, 가장 낮은 곳의 출신인 인물까지를 차례대로 다루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주인공을 담는 데에 주력한다. 임금도 선비도 무신도 천민도, 그 겉에 둘러싸인 모든 기표를 걷어내어 결국은 하나의 인간으로 남게 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궁리>에서는 세종도, 장영실도, 그 귀천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삶을 지탱해나가기 위한 투쟁을 벌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왕도 천민도 없는 이 시대에 여전히 우리가 장영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공과 업적을 세웠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개국 공신에게 밀려 태형 80대에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인간적 연민에 불과한 것일까?

 

 2012년의 한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법에 보장된 민주주의로 명시적인 평등을 보장받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여전히 암묵적인 신분이 존재하고, 그 신분에 따라 개인이 가진 기량을 펼치는 데에 제약이 따르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많은 장영실들을 생각하면, <궁리>를 보며 느끼는 씁쓸함과 연민이 그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감정에 그치는 것은 아니리라.

 

 수레를 만드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측우기와 자격루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라는 건 모든 시대가 증명해왔다. 최소한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의미 있는 삶을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장영실이 수레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연극 <궁리>와 함께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