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 기호학 (송효섭 교수님) 중간고사 답안
* 위계(hierarchy)의 기호학적 개념을 구성하고, 그 활용 사례를 제시하시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그 표면의 특질만을 보고 스쳐가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이면 혹은 기저에 숨겨진 특질을 이끌어낸다. 또한 그 발견에 근사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세상에서 벌어졌던,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벌어질 일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외피 너머의 것을 끌어내어 설명하는 일이 인문학자의 작업이라면, 그는 현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설명하는 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한다.
지금과 같이 인문학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짐작컨대 그 작업의 과정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역사와 문학 그리고 철학이 구별되지 않았던 것은 동서를 불문하고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학문들이 고유의 영역을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영역과의 차이를 둠으로써 각자의 입지를 공고히 한 결과 각자의 고유한 이름이 붙어 분류되는 지금의 학문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인문학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엄격한 의미의 학문적 경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한다면 그 영역 내에서 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즉, 학문 간 소통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기호학에 대해 흔히 ‘권력이 없는 학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호학을 언급하고 연구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위에서 언급했듯 학문간 소통이 증가하는 추세에서 비롯한다. 각각의 학문 체계가 가진 다른 방식의 언어를 매개하여 세상의 현상을 ‘기호’를 중심으로 한 구조로 설명함으로써, 학문 간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메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영역에 고립되어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기보다는, 메타언어를 통해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시도되는 총체적인 연구가 유의미함은 많은 학자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특히나 분야나 장르의 경계를 초월하는 간단명료한 기호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모든 현상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구조주의 기호학자들의 주된 작업이다.
기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우는 소쉬르와 퍼스를 필두로 수많은 기호학 연구가 있어왔고, 문화라는 거대한 현상을 기호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야콥슨, 로트만, 그레마스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왔다.
특히 유리 로트만은 베르나츠키의 ‘생물계(biosphere)’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기호계(semiosphere)’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기호계는 ‘언어들의 존재와 기능을 위해 필요한 기호학적 공간’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 곳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이원주의와 비대칭성이라는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로트만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기호계의 내적 공간은 불균등하지만 동시에 통일되고, 비대칭적이지만 균질적이다. 모든 문화는 세계를 자체의 ‘우리’ 혹은 ‘나’의 내적 공간과, ‘그’ 혹은 ‘그들’의 외적 공간으로 나눔으로써 시작된다. 죽은 것으로부터 살아있는 것을, 유목으로부터 정착을, 평야로부터 도시를 분리시키기도 한다.
기호학적 체계의 구조적 조직화에서 최고 형식과 최종 행위는 그것이 그것 자체를 기술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문법들이 기술되고 관습과 법칙들이 코드화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날 때 체계는 유연성과 향상된 정보능력, 역동적 발전을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미결정성의 창고’를 상실해버린다. 물론 자기 기술의 단계는 너무 많은 다양성의 위협에 대응하여 필요한 것이지만, 유연성을 잃고 경직될 수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모든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의미가 발생한다. 가령 적도 부근의 열대 지방에만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은, 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달리 ‘더위’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 것이다. 항상 같은 기후 조건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환경을 ‘덥다’는 유표적 기호나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호 간에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그 차이들은 사회 내에서 동등하게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표현의 편의상 어떠한 성질을 가지는 것을 +로, 갖지 않는 것을 –로 표현한다면, 그 속성을 갖고 있음과 갖지 않음은 단순한 ‘차이’로 대칭적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사회에서든지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담론, 즉 ‘주류(main stream)’에서 존재하는 선호에 따라 기호 간의 차이는 형식적으로는 대칭이지만 실질적인 비대칭성을 낳는다. 그 선호는 의도적인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자연스러운 위계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가령 위에서 언급했던 ‘더위’라는 기호는 ‘따뜻함’이라는 기호와 비교했을 때 ‘+불쾌’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므로, 똑같이 ‘고온’이라는 속성을 보유함에도 불구하고 ‘-불쾌’의 속성을 지닌 ‘따뜻함’보다는 배척되는 경향이 있다.
무표적인 기호들, 즉 사회적 담론에서 주류(main stream)의 코드에서 어긋나지 않으므로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기호들이 있다면 주류의 코드에 비해 유표적인 기호들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 의도와 상관없이 유표성을 가지는 기호들은 소외나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사회를 주도해가는 기호들이 권력을 얻게 되면 그들의 코드에서 비껴가는 다른 약호들은, 흔히 말하는 ‘모난 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 구조는 항구 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성을 기저에 두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의 과정에서는 수많은 중간적 단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끊임없는 약호들 간의 충돌로 다양한 변이를 산출해내기도 한다.
서양에서 고대 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의 세계를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론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가 인간을 죄로 이끄는 쾌락과 결합되어 있다고 하여 윤리적으로 열등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스테시스는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약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양에서 ‘육체’라는 기호 주변의 ‘감각’, ‘욕망’ 등의 기호는 ‘정신’을 둘러싼 ‘이성’, ‘지각’ 등의 기호가 중심부에 놓여 권력을 가졌던 오랜 기간 동안 상대적 소외의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위계 구조는 상당히 공고한 것이어서 플라톤이 살았던 기원전 400년대의 세계부터 장장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큰 틀에서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 긴 세월동안 다른 영역의 담론들은 천지개벽의 정도로 위계질서의 전복이 이루어졌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호계의 역동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유별난 위계에 도전장을 내민 건 바로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현상학이었다. 종래의 서구 철학과 문화 전반에서는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로, 몸을 ‘시공을 채우고 있는 도구’(‘+수단’, ‘-목적’, ‘-주체’) 정도로 보았다. 즉, 몸이 있기에 모든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잊었던 셈이다. 메를로퐁티에 따르자면 이는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규정된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몸은 외부에 존재하는 의식의 지각 대상이기 이전에,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된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허구적인 원근법에 드러나는 약호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들은, 그때까지의 회화의 탐구와 역사를 마감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회화의 기초를 확립한 척 한에 있어서 거짓된 것들이었다. 반면 화가들은 어떤 원근법의 기술도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즉, 회화에서 원근법의 약호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구성된 시야를 보여주는 허구적인 약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안의 존재인 몸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 세계 바깥에 위치하는 의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에 대해 작위적으로 설정된 허구적인 지점이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두고도 존재의 조직 안에 들어있는 ‘눈의 관점’에 따라 그때그때 나타나는 시야만이 있으며, 그림 역시 무한하게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식’ ‘지각’ 등의 약호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몸’과 ‘감각’이라는 약호들이 중심에 서서 무표적인 기질을 획득하는 위계의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위계가 도전을 받았고 그 흐름에 영향을 받아 라깡, 들뢰즈 등의 학자들은 ‘몸’이라는 배제되어있던 기호와 그를 둘러싼 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주류의 코드와는 영영 일치되지 않을 것 같았던 ‘감각’이나 ‘욕망’이라는 약호들이 2012년 오늘날에는 눈에 띄거나 주목받지도 않고, 오히려 ‘정신적’이라든가 ‘지각’, ‘이성’등의 약호가 유표적이 되어버린 것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몸의 아름다움에 관한 기호들, 신체적 건강에 관한 기호들이 대중매체 등을 통해 끊임없이 노출되고 재생산되는 현상을 보면 언제 이 기호들이 유표적이었던 때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물론 기호계의 역동적 구조를 고려한다면 지금의 위계 또한 시간이 지나고 기호들의 상호작용과 충돌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 과정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몸에 몰입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시선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표적인 중심부를 둘러싸고 안정적이고 조용한 기호계를 상상한다면 외관상 ‘평화로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역동성이 결여된 기호계는 존재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특수한 상황 하에 그런 기호계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주변부에서 특별한 모양 없이 부유하는 수많은 기호들의 잠재적 에너지가 분출될 기회를 박탈시키는 셈이다. 주류의 무표성과 소통하고 끊임없이 침투하려는 주변부의 유표적 기호들이 있는 한, 그 기호계는 ‘건강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