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 나부랭이/국문과

연극 <목란언니> 감상

Danzon 2012. 4. 22. 03:17

나도 목란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서럽고 많이 아팠던 이번 봄의 내게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나지막이 다독여주던 목란언니에게, 기회가 된다면 정작 당신은 괜찮은 것인지묻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이 그리도 고맙게 느껴졌던 나를 되돌아보니, 그녀 또한 괜찮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를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일순간 마음이 먹먹해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터민이라고도 일컬어지지만 흔히 탈북자라는 주홍 글씨와도 같은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2만명 가량 함께 사는 시대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괜찮다는 말이 결코 예삿말이 아닐 것이다. 국경을 넘으며 마주했을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토록 원하던 땅을 밟았지만 타자(他者)로 취급받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깊은 한으로 울어낼 괜찮다일지 모른다.

 

무대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사방의 관객에게서 쏘아지는 시선의 거미줄에 얽혀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대 위에서, 몸 하나 겨우 눕히면 꽉 들어차는 작은 크기의 침상 위에서 다리는 쭉 페고자라는 대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에 아찔함을 느낀 건 나뿐이었을까?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고, 그 시선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조대자 여사의 말처럼 쉴 새 없이 달리기에도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과연 두 다리 쭉 페고 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으니 말이다.

 뒷모습조차 편치 못한 중앙무대의 공간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몽타주들은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이 동떨어진 세상처럼 느껴지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움찔하게 만든 이유는 이 무대의 역할이 컸다. 현실이라는 쌀알을 뻥튀기 해놓은 듯한 연출에서도, 배우들이 등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현실감을 주기에 상당히 효과적인 장치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같은 연출과 연기가 이루어졌더라면, 어린 목란이 영어를 남발하던 유치원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장면이나 조대자와 강국식의 다국어 대화 장면 등은 객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만나야겠지요.

 중앙 무대에 연결된 두 개의 보조 무대는 대부분 남한과 북한을 각각 상징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수령 동지의 초상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한 쪽은 붉은 조명을 주로 사용하여 북한을 형상화하였고, 단군 왕검, 태조 이성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걸린 한 쪽은 파란 조명을 주로 사용하여 남한을 형상화하였다. 남한을 상징하는 보조무대에는 그 초상들과 같이 목란의 과거 사진들이 걸려있었는데, 아마도 목란이 그런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이 동등한민주주의의 일원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그녀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현재 목란이 거주하는 남한이라는 공간에서 부유하는 것을 표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하게 만들었다.

 또한 두 보조무대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중앙무대를 통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 거리가 많이 멀기는 하지만 둘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할 운명임을, 그리고 그 과정에는 남한과 북한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중앙무대의 공간이 필요함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남북한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서로를 적대시하기에 바쁜 최근의 정세는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던 통일과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당위성은 제쳐두고)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그 통로가 될 중앙무대에 커다란 벽이 하나 가로막혀있는 셈이지 않은가 말이다.

 

책이 아닌 구원은 어디에?

 문학, 사학, 철학이 설 곳을 잃은 시대를 보여주는 삼남매의 좌절은 인문학도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대의 소품 중 제법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들은 그들이 한때 가슴 가득 품었던 학문적 열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퀴퀴하게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은 점점 존재의미를 상실해 가고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심지어는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장면까지도 나온다. 인문학도에게는 그 존재의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은 그들의 구원이, 아니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상 삼남매의 구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어느 순간 가족의 일원으로 불쑥 끼어든 목란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란의 순수성이 태산, 태강, 그리고 태양을 구원하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순수한 그녀는, 조대자 여사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이 바로 선인간형이며 그 특유의 올곧음으로 삼남매를 구원할 빛줄기처럼 다가간다. 물론 결말부를 통해 드러나듯 목란의 작은 힘으로는 그들을 궁극적 구원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으며 목란 본인조차도 결국은 거대한 구조의 힘 앞에서 그 순수를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잠시나마 이 먹물들을 향한 인간적 애정이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먹물의 우상과도 같은 책의 활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으며, 태산의 아픔을 치유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대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가족의 대들보이자 삼남매의 근원이며 자본주의 이면의 아픔을 상징하는 대자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목란의 순수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코디언, 그리고 5천만 원.

 극을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소재가 있다면 바로 아코디언과 돈 ‘5천만 원일 것이다. 목란의 순수를 상징하는 아코디언은 태산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었고, 아코디언과 그 선율은 목란이 떠나간 이후에도 태산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반면 목란은 그리도 원하던 5천만 원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은 그리던 고향으로 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순수를 완벽히 상실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목란이 아코디언과 5천만 원 중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폐쇄적인 북한의 사회구조가 그녀를 도망치게 만들었으며, 힘겹게 들어온 남한에서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물론 냉정히 말한다면 남한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이 땅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각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에 적응함으로써 5천만 원을 획득한 결과는 더욱 더 참혹하다. 태강이 그녀에게 5천만 원을 주지 않았더라면, 목란이 그냥 이 땅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더라면, 최소한 그녀는 아코디언을 품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미안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지 못해서.

 목란언니가 내게 괜찮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지 자문한다면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의 중앙무대에는 거대한 장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다, 경쟁에서 지지 않고 달리느라 내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여유나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미래를 구원하려는 순수의 손길이 아코디언 선율로 뻗어온다면, 코웃음치며 차라리 활자에 얼굴을 파묻어버리거나 로또에 매주 5천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을는지.

 

 그래서 미안합니다. 지금의 나는 목란언니 당신에게 괜찮다고 토닥여주지 못합니다. 이 땅 어딘가에서 숨 쉬고 같이 살아가고 있을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조차 서툴기에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2시간 가까이 아코디언 소리를 들어가며, 휘몰아치듯 지나가던 당신의 일부 속에서 호흡하며, 그리고 이렇게 글로 풀어내며 발견한 가느다란 빛줄기나마 구원으로 여기며 붙잡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 당신을 위로할 날이 올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그릇이 조금 더 깊어지고 커질 수 있다면, 이 달리기를 조금 멈추고 아코디언을 품어볼 용기를 내어보려 합니다.